왜 일은 몰려서 오는 것일까?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로 번역 일도 기복이 있는 편입니다. 안정된 고객을 확보하지 않은 경우 일이 많다가도 1주일 이상 일이 없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 일을 할 초기에 특히 심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행히 지난 몇 년 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감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은 평소보다 일이 많이 줄어들어 조금 걱정했는데 이번 주 초에 제법 큰 작업(실제로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평소에 받는 작업에 비해서는 큰 편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일이 몰려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먼저 받은 프로젝트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일은 (아주 소량이 아니라면) 거의 모두 거절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초에 열흘 일정의 작업이 있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진행되고 있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작업이 착수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일도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네요.

지난 며칠 사이에 거의 지난 1개월 동안 올 작업이 몰려서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번역이란 것이 마감일(Deadline)이 설정되어 있고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작업량이 정해졌기 때문에 아쉽지만 처리할 수 없는 의뢰는 거절하고 있습니다.

간혹 번역가 중에는 일이 몰려 올 때 무리를 해서라도 일을 받아서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일이 있을 때 받아서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제 나이 때문에 밤샘 작업은 무리라서 저는 절대로 무리하게 작업을 받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작업량을 조절하고 처리를 못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 길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한 방법 같습니다.

국내 업체와 거래할 때에는 몇 번 거절하면 이후에 잘 연락이 안 옵니다. 하지만 해외 업체와 거래하는 경우 거절하더라도 바빠서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하면 대부분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 거래 초기에 일을 거절하지 않고 몇 번 작업을 수행하여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괜찮은 관계를 구축해 놓으면 이런 상황 때문에 거래가 끊기는 일은 드문 편입니다.

비교적 큰 작업을 여유롭게 일정을 받아서 진행하면서 끼어드는 작은 작업을 처리하는 것이 괜찮은 시나리오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에이전시는 대부분 일정을 빡빡하게 설정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제가 이전에 에이전시에 근무했을 때 큰 작업을 여유롭게 일정을 잡아서 주면 나중에 꼭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여유롭게 일정을 받아 일을 하게 되면 여유를 부리다가 막판에 몰려서 마감일을 지키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에이전시는 여유롭게 일정을 주기보다는 합리적인 일정을 제시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납품을 하도록 요구하기도 합니다. 번역가 입장에서 보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에이전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거래하는 업체 중에도 간혹 큰 작업에 대해 순차적인 납품을 요구하는 업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납기를 거의 거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믿고 맡기는 편입니다. (한 번은 제법 분량이 있는 작업을 진행하다가 집안에 일이 생겨서 진행 중인 작업을 반납해야겠다고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거의 유일하게 납기를 지키지 못한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 의뢰처에서 납기를 연장해주어서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을 받으면 하루에 처리할 양을 정하고 스케줄대로 진행합니다. 대부분 본래 일정보다 일찍 끝나도록 스케줄을 짜는 편이고, 타이트한 경우는 일을 받기 전에 미리 납기일 연장을 요구하여 일을 여유롭게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저는 깐깐한 프리랜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5개 댓글

  1. "왜 일은 몰려서 오는 것일까?" - When it rains, it pours 니까요. ㅋㅋㅋ

    어느 분야의 일이나 그렇습니다. 제 누나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일하는 RN 인데, (그것도 위급환자들만 있는 ICU 에서 일합니다.) ICU 환자들이 언제 숨이 넘거갈지 모르는 사람들 이잖아요. 그런데도 환자들이 순차적으로 목숨이 위급한 상태가 되는게 아니라, 한명의 환자에게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환자들도 덩달아서 같이 생명이 위급해진다고 합니다. ㅋㅋㅋ

    세상 모든일이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하나씩 차근차근 생기는게 아니라 어떤 문제가 생길때는 갑자기 멀쩡하던 다른일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그리고 문제가 생겨도 좋다 싶을때는 절대 문제가 안생기죠. ㅋㅋㅋ

    머피의 법칙, 이게 어떤 근거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 'When it rains, it pours.'가 나쁜 상황에 많이 사용되나요?
      (이런 표현을 책을 통해서만 배우다보니 실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감이 잘 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 관련 책도 나오고 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니 반갑네요ㅎㅎ

      1. Murphy's Law 는 공학도, 엔지니어, 프로그래머들에게 가장 친근합니다. 특히 프로그래밍에서 뻑날 수 있는건 항상 최악의 시기에 뻑난다 (anything that can go wrong, can go wrong, 혹은 will go wrong at the worst possible time) 라는 식으로 말하거든요.

        실제 그러니까요. ㅠㅠㅠㅠ

        When it rains, it pours 는 좋은 경우에도, 나쁜 경우에도 사용합니다.

        일이 갑자기 바빠져서 막 투덜거리고 있으면, 제 사업파트너가 주로 쓰는 말. 여기에 꼭 한마디 덧 붙여서 염장을 지르죠.

        Hey, it's a good problem to have. (좋은 문제라는 겁니다. 일이 많아서 바쁘지만, 그 만큼 돈이 들어온다는 얘기니까. 반대로 일이 없어서 한가하면 더 큰 문제라는거죠.)

      2. '좋은 문제'(a good problem)... 좋은 표현이네요.ㅎㅎ

        비슷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일종의 '공조현상'(harmonization)과 비슷하지 않을까 제 마음대로 생각해봅니다. (웃음은 전염되듯 나쁜 일도 전염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가끔 있습니다.)

        "When it rains, it pours"의 경우 한글로 번역된 것을 보면 '나쁜 일은 한꺼번에 밀어 닥친다' 혹은 '설상가상'(엎친 데 덮친 격)처럼 부정적인 표현으로 번역된 것이 대부분이라서 나쁜 상황에 주로 사용되는 표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중립적인 상황에서도, 혹은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여기서 부정적이라는게, "업친데 덥친격" 정도? 수준 까지는 아닙니다.

        "업친데 덥친격" 은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짤렸는데 알고보니 자기 와이프가 자기를 짜른 직장상사와 불륜관계. 이런게 업친데 덥친격 아닌가요? >.< 매우 부정적으로 쓰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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