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포위 공격과 멸망(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David Roberts (1850). Photo by Wikipedia

[낙서장] 말로 까먹는 스타일

열흘 전쯤 저녁에 치킨과 피자를 시키기 위해 네이버에서 검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주문한 적이 있는 프랜차이즈를 찾아서 시키려고 하다가 후기를 보고 주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이 후기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확인해보니 며칠 전 이틀 동안 긍정적인 후기만 7개나 집중적으로 새롭게 올라왔네요.)

네이버에 올라온 어떤 프랜차이트 점포에 대한 사용자 평가

네이버에 올라온 어떤 프랜차이트 점포에 대한 사용자 평가

이렇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로 까먹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해도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간혹 천재이면서도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냥 그런 속담이 있는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이 말이 지닌 위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은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사에 말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은 무시 당하기 일쑤입니다.

기업 면접을 볼 때에도 말을 긍정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아는 분이 서울시 산하 조직에 경력직으로 면접을 보러 갔는데 질문 중 하나가 “자신의 단점은 무엇입니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면접을 보던 어떤 사람이 “제가 제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압니까?”라는 대답을 했다고 하네요. 그 사람은 분명 면접관으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똑 같은 취지의 말이라도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말로 인해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나옵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로 구원 받은 강도

대표적인 경우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우편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는데요, 당시 상황을 알면 왜 우편 강도가 축복을 받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그러한 강도처럼 여기고  예수님을 모욕하고 비웃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누가복음 23:35-36)

그런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면서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가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말로 예수님을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에는 이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었습니다.

일부는 이 장면을 들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볼 문제는 우편 강도가 과연 믿음이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로마서 10:17)고 하였는데,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이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었을까요?

심지어 3년 동안 따라다녔던 가룟 유다는 12사도 중 하나였지만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예수님이 잡힐 때에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까지 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 11:16)라고 큰소리친 도마도 막상 죽음의 위기가 닥치니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아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편 강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행악자라고도 표현된 두 강도는 십자가형을 받은 중죄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사형 판결은 잘 안 내립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같이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됩니다. 마찬가지로 두 강도도 이런 유영철과 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중죄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믿음을 갖게 되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도망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위로한 사람이 바로 우편강도였습니다. 우편강도는 당시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꼼짝하지 못한 상황에서 말로써 예수님을 두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으로 인해 우편 강도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편 강도는 대제사장들과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로하는 말을 함으로써, 말 한 마디를 잘 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자식을 얻지 못한 다윗의 아내 미갈

미갈은 다윗의 첫 번째 부인이었지만 아버지 사울왕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시집가게 되었다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다윗이 미갈을 데려와서 다시 다윗의 아내가 된 비운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원하던 하나님의 언약궤가 도착하고, 다윗은 열렬히 춤을 추게 됩니다. 그런 춤추는 모습을 본 미갈은 못마땅한 다윗을 향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0)

70세에 어린아이 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떨며 늙은 부모를 위안했다는 데서 유래된 노래지희(老萊之戱)라는 고사성어와 같이 다윗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왕의 체통도 잊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도착하게 되자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갈은 다윗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말로써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하 6:23). 당시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자식 없이 살다 간 비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다윗과 미갈의 불편한 진실 / 남편이냐 아버지냐 당신의 선택은?” 참고).

언약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Francesco Salviati, 1510), Photo by Wikipedia

언약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Francesco Salviati, 1510), Photo by Wikipedia

말 한 마디에 저주를 받은 이스라엘

예수님은 죄가 없었지만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요한복음 19:12)

하지만 유대인의 강한 반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게 됩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찌어다 하거늘 (마태복음 27:24-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찌어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거리낌없이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AD 70년 경에 멸망하게 되고 거의 1900년 동안 나라 없이 유량 생활을 하는 처지가 됩니다.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신명기 28:56-57)

이와 같은 성경의 예언에 따라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게 되고  외부와 단절되어 식량과 물이 떨어지게 되자 어린 자식까지 먹는 참혹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토 즉 옛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을 믿고 힘썼던 유대인들은 결국 역사의 기적이라 일컫는 이스라엘 독립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에스겔 37:12)

그 어떤 나라도 1900년이 지나서 독립을 이룬 나라는 이스라엘 외에는 없습니다. 보통 나라가 멸망하면 100년 정도만 지나도 민족혼이나 정신이 사라지게 되고 역사에게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36년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이 변절하게 되고 민족정신까지 흔들렸습니다. 만약 식민 상태가 100년 혹은 200년만 지속되었어도 다시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도 나라 없는 설움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고서 견딘 결과 오늘날과 같은 기적을 일궈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나찌 독일에 의해 600만 명이 희생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극을 겪은 후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특히 유대인들이 2000년 전에 외쳤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찌어다“한 그 말이 그대로 현실화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포위 공격과 멸망(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David Roberts (1850). Photo by Wikipedia

예루살렘 포위 공격과 멸망(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David Roberts (1850). Photo by Wikipedia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말 한마디 잘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자손들까지 홀로코스트를 겪는 비극을 겪었습니다(물론 이 모든 것이 다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지만요).

마치며

요즘 날씨가 덥고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날에는 말로 인해 시비가 자주 붙게 됩니다. 신문기사에도 이에 관한 내용을 자주 접하게 되고요.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즉각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2:16)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말에 대한 속담과 격언이 많지만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성격을 바뀌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야고보서 3:2)는 말처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실수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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